bookmark 불교와 연이 깊고 많은 불경을 섭렵했으며, 불교의 교리에 대하여 당대
고승들과 고증학적 안목으로 논쟁함.
백파긍선(白坡亘璇)ㆍ화담과 초의 선사와 깊은 우정을 나누었으며,
말년에는 봉은사로 삭발 출가 정진하여 선지식 반열로 대접을 받았다.
bookmark 보광사 주변에 김정희의 암각문 3점과 귤산 이유원의 암각문 10점등 13점
의 암각문이 산재해 있다.
봉선사의 스님으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신 운허스님이 석전스님에게 받은
법물인 족자에 ‘석전’이라 쓰고 전한 사연이 있다.
person 귤산 이유원(1814~1888)
bookmark 조선후기 함경도관찰사, 판부사, 공조판서, 한성판윤을 고종대에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백사 이항복의 9대 정손이다. 독실한 신심으로 천마산 보광사를 대대적으로 중건하고 원찰로 삼음.
귤산은 꿈에 관세음보살의 현몽을 받고 현몽만회암을 짓고 장자 이석영과
화도읍 가곡리 향리에 살며 집필에 전념하였다.
bookmark 저서로는 『임하필기(林下筆記)』ㆍ『가오고략(嘉梧藁略)』ㆍ『귤산문고』 등을
남겼으며 예서에 능했다.
person 보광사 주지 봉성 서린과 이석영(1855~1934)
이곳은 대한민국 건국의 토대를 마련한 곳이자
독립운동의 산실이며 민족의 토대를 놓은 곳이다!
bookmark 보광사 주지 봉성 서린스님과 이유원의 장자 이석영은 친분이 두터웠다.
bookmark 1908~1909년 봉성 서린스님은 보광사의 토지와 절의 전 재산을 처분하여
현금 이십만 원을 마련했다.
서린스님과 함께 이석영은 이유원으로 부터 물려받은 전 재산을 처분한
현금 이십오만원을 마련해 독립군 기지를 개척하기 위해 서간도로 망명,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 상해 임시정부 건물을 매입하여 기증하였다.
(이 사실은 우당 이회영의 장손 전 국정원장 이종찬의 증언이다. 2019. 9 .7)
독립운동 자금 등으로 재산을 다 쓴 이후 이석영은 중국 각지를 홀로
떠돌아다니다 1934년 중국 상하이에서 8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