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 많은 문화재가 일제에 의해 수탈당하고 많은 전란으로 소실되어다가 171년 전인 1851년(철종 2) 무렵부터 대대적인 중창을 하였다. 이때 당시 판부사(判府事)를 지냈고 뒤에 우의정ㆍ좌의정ㆍ영의정 벼슬에 올랐던 귤산ㆍ가곡ㆍ이유원(橘山 嘉谷 李裕元, 1814~1888)이 독실한 신심으로 절을 중건하고 원찰로 삼았다. 그는 대규모로 절을 다시 중창하고 자신의 정신적 스승인 당대의 고승 화담당 경화(華潭堂 敬和)선사를 모셨다.
그 후 1894년(고종 31) 봉성ㆍ서린(奉城 서린)스님이 한차례 절을 중수하였으나 일제가 침탈해 오자 풍양조씨 가문에서 출가한 봉성ㆍ서린스님은 천마산 전체와 전답 그리고 보광사까지 모두 정리한 금전 20만원과 이유원의 장자 이석영은 부친의 재산 망우리 전체와 금호동 일대의 토지를 모두 정리 금전 25만원 모두 45만원을 가지고 1909년 겨울에 압록강을 건너다. 30만원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 1919년 삼일 만세운동과 대한민국 독립선언서가 나오자 중국 상해 조개 지역에 임시정부를 설립하여 흩어져 있던 임시정부를 하나로 모았다. 비지를 얻어다 죽을 먹으며 연명하다 1932∼3년 봉성 서린스님은 아사하였고 이어 1934년 영석 이석영선생 또한 아사했다.
금호동ㆍ망우동ㆍ구리시 그 당시에는 모두 양주군이다. 이렇게 본다면 남양주와 보광사는 대한민국 건국의 토대를 놓은 곳이다. 모든 재원을 독립에 바친 보광사는 사세가 참으로 초라했다. 한국 전란으로 소실되고, 1960년에 대웅전마저 소실되었다. 그렇게 절터만 남아있던 곳에 학산당 영순(鶴山堂 永順)스님이 뜻을 세워 보광사의 명맥을 유지하였고, 1982년 화담당 유덕(和潭堂 悠德)스님이 절의 재건을 발원하여 토지를 매입하고 사세를 대폭 확장하다가 1997년 음력 10월 23일 적멸에 들었다. 그 뒤를 이어 장 상좌 가산 선우(嘉山堂 善友)스님이 현 대웅보전과ㆍ무량수전ㆍ삼성각ㆍ봉안당ㆍ환도다헌ㆍ향적당ㆍ영생인도 연화대 탑 등을 신개축하고 토지와 당호 불사를 통하여 옛 보광사의 모습을 되찾기 위한 불사가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