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범스님─관세음보살의 가피와 위신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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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보광사 댓글 0건 조회 965회 작성일 14-06-04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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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의 가피와 위신력/ 종범스님


오늘은 「관세음보살 보문품」 게송 부분을 중심으로
관음신앙의 네 가지 상념, 칭명, 예배, 공양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관음신앙의 실천 방법 중

첫째는 상념(想念)입니다.
항상 관세음보살님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앉으나 서나,
오고 가고, 쉴 때나 일할 때 늘
관세음보살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칭명(稱名)입니다.
늘 관세음보살 명호를 부르는 것으로“
관세음보살,관세음보살…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예배(禮拜)입니다.
관세음보살님께 항상 절을 하는 것으로 1배, 2배, 백배, 천배…,
이렇게 자꾸 관세음보살님을 향해서 예배를 올리는 것입니다.

넷째는 공양(供養)입니다.
관세음보살님께 꽃과 향, 과일, 곡식 등을
정성껏 공양 올리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 보문품」을 보면 상념, 칭명, 예배, 공양 등
네 가지의 관음신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게송 부분에 상념과 같은 내용으로 상원(常願)과
상청앙(常聽仰)이란 말이 나오는데
상원은 항상 관세음보살님께 발원한다는 뜻이고
상청앙은 관세음보살님을 늘 우러러 보고
공경하고 사모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관세음보살 보문품」의 경문과 게송 부분이
서로 보충해서 관음신앙에 대한 원만한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관세음보살 보문품」게송을 살펴보면 중생에게는 여러 가지
환란이 닥쳐 고통을 겪는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장애, 마장, 업장 등 많은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데 그 성격을 보면
밖에서 일어나는 장애가 있는가 하면 안에서 일어나는 장애도 있습니다.
밖에서 일어나는 장애는 바람의 재앙(風災), 물의 재앙(水災),
불의 재앙(火災), 감옥을 면치 못하는 옥살이 재앙도 있고
도둑떼를 당하는 재앙, 전쟁터에 나가는 재앙 등이 있습니다.

반면 안에서 일어나는 재앙은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세 가지 독성,
즉 탐독[貪]과 진독[塵], 치독[置]이라고 하는 삼독(三毒)과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라는 여섯 가지 티끌 때문에
본래 깨끗한 마음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겁니다. 즉,

중생이라고 하는 것이 삼독에 중독되어 있는데
마음속에 독이 섞여 있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욕심내는 마음, 화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이 섞여 본래 청정한 심성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 삼독은 내부적으로 독성이고 재앙이기 때문에 심각하며
이 세 가지 독성에서 자유롭게 되면 성불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불교는 옛부터 인도의 재래적인 방식에 의해서 출가·
삭발하는 법도가 있습니다. 출가를 한다는 것은
색성향미촉법이라는 육진(六塵, 여섯 가지 티끌)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며
삭발은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사고방식을 바꾼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가령 중생들은 밖의 세력이 좋아지면 행복하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권력이라든가 재물의 세력, 사람의 세력을 쫓습니다.
결혼을 할 때도 며느리, 사위를 잘 얻으려 하고
똑똑한 자식을 낳으려고 하는데 이것이 사람의 세력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서로 마음만 통하면 된다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부모님과 부딪칩니다.
그러나 몇 년만 지나게 되면 스스로 판단이 잘못됐다,
혹은 자신이 너무 무모했나 보다 하면서 후회도 하고
반성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요.

나이 많은 분들은 그렇지 않죠.
현실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 기성세대의 사고방식입니다.
어른들은 현실적인 세력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자식이 택한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한사코 반대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을 잘 맞아야 행복하다,재산이 많아야 행복하다’
혹은 권력이 있어야 행복하다 하는 마음이 중생의 마음입니다.

이렇게 범부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도
사람, 재산, 권력을 중심으로 보는데
부처님이 깨닫고 보니까 아무리 사람을 잘 만나도
마음에 독성이 있는 한 행복하지 않다는 겁니다.
권세가 있어도, 재물이 많아도 마음에 독성이 있는 한
사람은 행복하지 않다는 거예요.
그래서 밖으로 펼쳐진 세력에 의해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자신의 마음을 돌려서 행복을 찾겠다는 생각을 갖는 것,
이것이 사고방식의 전환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바꾼다는 의미로 머리를 깎는 겁니다.
바로 삭발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뭇 중생들은 여전히 밖에서 무엇인가를 구해서
행복해지려고 합니다. 결국 도를 닦는다는 것은
마음을 바꾼다는 것임을 모두가 알아야 합니다.

마음의 세 가지 독성은 매우 심각한 것이어서 한 번
중독되면 제거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탐독이 가장 심각합니다.
한용운 스님의 『님의 침묵』을 보면 그 안에는 많은 시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선사의 설법’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한용운 스님은 시를 통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선사의 설법을 들었다.

그 선사는 말했다.
애욕을 멀리 여의면 자유와 기쁨이 있다고 큰소리로 말했다.”

사실 애욕을 멀리 여의게 되면 사랑과 집착에서 벗어나게 되고
기쁨과 평화로운 마음이 찾아드는 게 사실입니다.
모든 고통과 괴로움이 애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데서 출발하지요.
계속해서 시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그 선사는 어지간히도 어리석었습니다.
그 애정에 집착을 여의는 것은 죽는 것보다 어리석은 것을
그 선사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즉, 애욕을 멀리 여읜다는 것은 이룰 수 없는 대안이니까
제시를 하나마나라는 거죠. 애정에 대한 집착을 여읠 때는
평화와 자유와 기쁨이 찾아오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안 된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따라서 애정에 집착을 여의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줄을 그 선사는 모르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용운 스님은 불교의 세계도 알고
중생의 세계도 알아서 불교의 방향을 제시하고
중생의 아픔도 함께 달래주는 그런 시를 쓰고 있는 셈이죠.
불교 사상과 문학성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기에
고전이고 명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의 자비(慈悲)와 위신력(威神力)은 밖에서 일어나는
재앙과 안에서 일어나는 재앙을 물리칠 수 있는 방편입니다.
이것이 관음신앙의 근본입니다.
몸이 아프다든지 하는 것은 밖에서 일어나는 재앙입니다.
밖에서 일어나는 재앙과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재앙도 함께
물리치는 것이 관음신앙입니다.
게송 부분에는 재앙의 여러 가지 사례,
즉 재앙의 항목들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수많은 재앙들을 어떻게 물리치느냐 바로
염피관음력(念彼觀音力)으로 물리칠 수 있다고 게송은 들려줍니다.

상념, 즉 관세음보살의 위신력을 생각함으로써 물리친다는 거죠.
관음력, 즉 관세음보살의 능력이 나에게 어떻게 오느냐?
바로 내가 관세음보살을 생각할 때 온다는 거예요.
그게 생각 념자(念)예요.
관세음보살에게는 무궁무진한 힘이 있고
우리는 그 관음력을 생각함으로 인해서 밖의 재앙과
안의 재앙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흔히 관음신앙의 영험이라고 하지요.

예를 들어 음식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영양가는 별로 없지만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기호식품과
영양가가 높은 영양식이 있습니다.
기호식품은 몸에 이롭지는 않지만 기분을 좋게 만들고,
영양식은 살이 되고 피가 되고 기운을 돋게 하는 음식입니다.
젊을 때는 기호식을 좋아하게 되고 나이들면 영양식을 하게 됩니다.
입에만 좋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영양가 높은 음식이라도 그냥 놔두면
나한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문제는 먹어야 된다 이겁니다.
먹으면 도움이 됩니다. 관음신앙도 그런 원리예요.

관세음보살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능력이 있고
자비가 있고 원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두면 나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죠.
내가 생각을 해야 됩니다.
염피관음력, 즉 내가 관세음보살님의 위신력을 생각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오래된 암실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곳은 항상 어둡겠지요.
그러나 문만 열면 태양이 항상 밝게 비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태양이 그토록 밝지만 암실은 항상 어둡습니다.
문제는 밝은 햇빛을 어두운 방안으로
어떻게 끌어들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인데
간단합니다. 문만 열면 되는 것이죠.
문을 열면 태양을 맞이하게 되고 그러면 암실은 순간 사라지게 됩니다.
염(念)이 그런 의미입니다. 즉,
높은 산이 있으면 올라가야지 산은 산대로 홀로 높고 나는 나대로
늘 밑에 있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신앙이라는 것도 상념,
늘 생각을 하면 그 생각이 인연의 고리가 되어 위신력을
나한테로 오게 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중생들은 삼독과 육진 안에 둘러싸여서 밖으로 보이고
들리는 데만 정신이 팔려 마음의 능력을 발휘하지 않습니다.
마치 사람의 능력은 수도관과도 같습니다.
물이 수도관에 차 있는데 항상 닫혀 있어서 안 나오는 거죠.
그럴 때 수도꼭지를 열면 물이 바로 흘러나오게 됩니다.
사실, 수도를 틀어서 나오는 게 아니죠.
늘 물이 흐르게 돼 있는데 중생들 스스로 막아놨을 뿐입니다.
막아 놓은 부분만 제거하면 본래 흐르는 모습으로
되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삼독과 육진은 말하자면
수도꼭지를 막아 놓은 상태와 같은 이치입니다.
관세음보살을 생각하면 꽉 막아놓은 수도꼭지를 열어놓은
상태가 되는 것이기에 본래대로 물이 흐르는 모습,
즉 염피관음력으로 장애를 물리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불가사의한 점입니다.
관음신앙은 물질과 물질로써 설명되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생각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기에 불가사의한 면으로 설명되는 내용입니다.

관세음보살의 염피관음력으로 모든 장애를 해결할 수 있는데
그 상태를 해탈(解脫)이라고 합니다.
개득해탈, 즉 벗어나게 된다는 의미죠.
해탈이라는 것은 어떤 장애나 문제가 없는 상태,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중생들 스스로 삼독에서 나왔다고 하는 얘기와 같은 뜻입니다.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이 부모한테서 나왔다든지 어떤 일을 두고
역사가 잘못돼서 그랬다든지 혹은 혈액형이 달라서
그랬다든지 하는 외부적인 조건을 문제삼곤 합니다.
그것은 불교적인 사고방식이 아닙니다.
부모와 연관 짓고 사회와 역사와 관련짓는 것은
세속적인 사유체계입니다.

불교적인 사유체계는 마음을 바꾸면 됩니다.
모든 문제가 내 삼독에서부터 비롯됐다고 하는 자세,
이것을 사성제에서 말하는 고집이라고 합니다. 즉,
인간에게는 많은 고통이 있는데 유전자가 조작돼서 나왔다든지,
가문이 이상해서 나왔다든지,
역사적인 대가를 치른 탓이라든지 하는
세속적인 방법과는 거리가 멀지요. 불교적인 방법은,
삼독에서 괴로움이 나왔다고 하는 고(苦)는 집(集)이라고 하는
번뇌에서 나왔다는 것이 부처님이 발견하신 깨달음입니다.

이 깨달음을 얻는 것은 마치 나무를 보고
불을 발견한 것처럼 어려운 일입니다.
처음에 나무에 불이 있다는 것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꽃피고 잎지고 하는 나무에 불이 있다는 것을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기까지 상당히 오랜 세월이 걸렸듯이
‘중생에게 기쁨이 어디서 오느냐’
‘내 마음을 바꾸면 기쁨이 온다’고 하는 이치를 깨닫는
과정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진리를 아는 것이 결국 깨달음인데 지금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쉽게 듣고 있지 않습니까?
시커먼 돌멩이 속에 금덩이가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한 것보다
몇 배 더 어려운 법문을 편안한 자세로 듣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 집안에 오면 듣는 게 매일 이런 소리니까 오다가다 듣는
얘기인 줄 아는데 귀한 말씀입니다.

대개 우리들은 그러지요.
“우리 아버지가 나를 조금만 이해해 주면 잘 될 것 같다.
엄마가 달라지면 내가 좋아질 것 같다.
우리 선생님이 잘 해 주면 좋을 텐데….”
마치 내 행복이 밖에서부터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내 행복은 내 마음에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위대한 발견입니까?
콜롬부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한 것은 다 아는데
부처님이 최초에 이런 행복의 틀을 새롭게 발견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이것은 인류문화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이라고 『천수경』에 나오지요.
그저 높고 깊고 미묘한 부처님 법입니다.
나무 속에 불이 있다는 것을 알듯이 사람 속에도 불성(佛性)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 불법(佛法)입니다.

그렇다면 불성이란 무엇입니까?
행복을 마음대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삼독과 육진이 중독돼서 지금까지
불행을 만들고 있는 것이 범부들의 모습입니다.
나의 불행이 어디서 왔는가 하는 문제는
나의 삼독으로부터 왔다는 대답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청정심을 일으키는 것을 발심이라고 하는데
그 청정심은 태양이 암실을 환하게 비추어 어둠을
없애주는 것과 같이 우리 마음속에 있는 불행을 사라지게 합니다.

본래 모습을 찾는 것이지요.
이렇게 본래의 모습으로 되찾아진 상태를 해탈(解脫)이라고 합니다.
「관세음보살 보문품」 게송 부분에

“관음묘지력(觀音妙智力) 능구세간고(能救世間苦)하니

“관세음보살의 미묘한 지혜의 힘이 능히 세간의 고통을 구제하니

구족신통력(具足神通力) 광수지방편(廣修智方便)하고

신통력을 구족하고 지혜방편을 널리 닦아서

시방제국토(十方諸國土) 무찰불현신(無刹不現身)이니라.”

시방세계 모든 국토 나타나지 않는 법이 없다.”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중생의 한결같은 특징은 안으로부터 삼독이 중독되어 있고
밖으로는 수많은 고통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평생 욕망과 고통의 굴레를 안고 살아야 합니다.
욕망이 없고 고통이 없는 건 도인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관세음보살을 늘 생각하고 공양하고 예배하게 되면
밖의 재앙이나 안의 재앙이 다 소멸하게 되고
소원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 관음신앙입니다.

우리는 흔히 대자대비 관세음보살로 알고 있는데
「관세음보살 보문품」에서는
관세음보살의 오관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관(觀)이라는 게 ‘본다’라는 뜻으로 관세음보살이 갖고 있는
다섯 가지 보는 힘을 뜻합니다.

첫째는 진관(眞觀)으로 참세계를 보는 능력입니다.
둘째는 청정관(淸淨觀)으로 청정함을 보는 능력이고,
셋째는 광대지혜관(廣大智慧觀)으로 지혜로써 보는 능력이고,
넷째는 자관(慈觀),
다섯째는 비관(悲觀)으로 자비로써 본다는 것입니다.

이 관세음보살의 오관을 계환 선사라는 분이 해석하기를
진관은 모든 허망한 습관들을 다 여읜 상태, 즉 심망이라고도 하는데
망을 쉰다는 뜻입니다.
중생들은 부질없는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쓸데없는 줄 알지만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그게 중생입니다.
진관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진실을 보는 힘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죠.

청정관은 관세음보살이 중생들의 물든 상태,
오염된 세계를 다스린다는 말입니다.

지혜관은 관세음보살이 지혜를 통해서 중생들의 어리석고
미혹한 상태를 벗어나게 한다는 뜻입니다.
미혹함에서 벗어나는 것을 파혹이라고 합니다.
미혹함을 깨뜨린다는 말이죠.
사람들은 미혹하니까 속게 됩니다.
속인 사람이 이러저러해서 속였다고 신문에 내고 방송에 내는데
해마다 똑같은 방법으로 속는 사람이 나옵니다.
속이는 사람보다 속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혜가 부족해서 순간적으로 속는 거죠.

흔히 나는 부모를 위해서 잘 해 드린 것도 없으면서 자식들이
“어머니, 아버지를 평생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경우를 봅니다. 부모들은 그 순간 속게 됩니다.
어느 자식이 제 볼일 내팽개치고 부모만 모시겠습니까?
인간이라는 것은 그렇게 안 되게끔 돼 있어요.
다 제 볼일이 있고 제 자식이 있고 그런 거예요.
그런데도 순간적으로 어머니 아버지를 아무 고통없이
모시겠다고 하면 속아 버립니다.
지혜가 환하게 밝으면 미혹하지 않습니다.
지혜관을 갖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비관은 고통에서 건져 주는 능력입니다.
자관은 여락이라고 해서 기쁨을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사자성어에 ‘발고여락’이란 말이 있습니다. 즉,
고통에서 빼내어 즐거움을 준다는 뜻이죠.
고통받는 중생에게 손길을 펼쳐 주는 것,
그것이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의 많은 손이 하는 일입니다.
이처럼 오관으로 중생을 보살피는 것이 관세음보살입니다.

『삼국유사』에는 우리 나라 관음신앙의 내력을 살펴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영험사례가 실려 있습니다.
자비관음의 모습은 분황사에 모셔진 관세음보살님의 영험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실명한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따라
분황사에 와서 노래로 기도를 합니다.
신라 향가 대부분이 관세음보살님께 노래한 내용으로
전달되고 있듯이 이 노래도 향가에서 중요한 대목 중의 하나입니다.

“즈믄(천)손 즈믄(천)눈을 가지고 계신 관세음보살님
당신은 눈이 천개인데 우리 아이는 한 개도 없습니다.
한 개도 없는 우리 아이에게 눈 하나만 주세요.”

이 노래는 자식의 눈을 뜨게 하고 싶은 모정이 철철 넘치고 있습니다.
반면에 그렇게 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한(恨)이 담겨 있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은 눈을 천개나 갖고 있으면서 우리 아이에게
한 개도 안 주면 안 된다고 하는 감정이 바탕에 깔려 있는 셈입니다.
아주 간절하게 호소하면서도 한편에서는 안 들어주면
재미없다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이죠.
정(情)과 한(恨)을 동시에 노래하고 있는 것으로
우리 민족의 감정이 담겨 있습니다.
다행히 관세음보살님은 한을 남기지 않고 아이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정과 한의 감정은 ‘왕생가’라는 노래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서방정토 극락세계 아미타불께
극락세계에 가고자 하는 사람이 동방에 있다고 전해 주시오.
만약 나를 버려 두신다면 당신의 원이 이루어지겠습니까?”

이처럼 달님에게 간절하게 호소를 하면서도 동시에
한까지 묻어 보내고 있는 셈이죠.
다음은 중생사의 관세음보살에 얽힌 일화를 소개합니다.
먼저 중생사에 관세음보살을 조성하게 된 배경을 들려 드리면,
중국 당나라 황실에서 우리 나라의 유명한 화가를 초청합니다.
중국의 황제가 총애하는 여인을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고 화가는
인물화를 그리지요. 그런데 그만 무심결에 붓을 떨어뜨리고 맙니다.
그것도 빨간 물감이 묻은 붓을 여인의 배꼽 밑에 떨어뜨린 것이죠.
아무리 지우려 해도 도저히 지울 수가 없었어요.

화가는 할 수 없이 황제에게 여인의 배꼽 밑에 빨간 사마귀가 붙은
미인도를 올립니다. 황제는‘인물은 그대로 그렸는데 배꼽 밑에 그려진
사마귀는 어떻게 그렸을까?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네가 여인의 얼굴은 그릴 수 있다지만 몸 속에 있는 사마귀는
어찌 그릴 수 있었느냐?”며 호통을 쳤습니다.

화가는 자초지종을 설명했지만
황제는 믿지 않고 그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대신들은 황제에게 화가는 어질고 정직하니 의심하지 말고
풀어 줄 것을 간청합니다. 그렇지만 황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그려낸 화가를 탓하며 만약 안 본 것도 그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젯밤 황제 자신이 꿈에 본 것을 그려보라고 억지를 부립니다.
그러면 풀어 주겠다는 말이죠.
화가는 할 수 없이 십일면관세음보살님을 그립니다.
황제는 이것이 바로 꿈에 본 부처님이라면서 화가를 풀어 줍니다.
화가는 신라로 돌아와서 중생사에 십일면관세음보살님을 조성합니다.
그 이후로 이 관세음보살님은 영험이 많아서 기도 끝에
아들을 얻은 사람도 많고 복 받은 사람, 소원 성취한 사람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 한 예로 견훤이 포석정을 공격해 난리가 났을 때의 일입니다.
최을함이란 사람이 기도를 해서 아들을 얻었는데
석달밖에 안 된 아이를 피난길에 데리고 갈 수 없었어요.
할 수 없이 관세음보살님 탁자 밑에 숨겨 놓고 아버지 최을함은
한 달 이상 피난갔다가 돌아옵니다. 와서 보니
아이는 젖 냄새를 그대로 풍기며 살아 있었습니다.
볼에는 젖 먹은 흔적이 묻어 있고 방실방실 웃고 있었던 거죠.

또 한 번은 절에 양식이 떨어졌어요.
절을 지키는 스님들은 다른 절로 옮겨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죠.
그때 주지 스님의 꿈에 관세음보살님이 나타나서는
조금만 기다리고 있으라는 겁니다.
며칠 후에 스님 몇 분이 김해에서 찾아왔습니다.
왜 오셨냐고 물었더니 이곳 스님이 김해로 오셔서 화주를 나와
지금 소금하고 쌀을 소에다 싣고 왔노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생사에서는 한 명의 스님도 밖으로 나간 일이 없었기에
그런 일이 없다고 했죠. 그랬더니 무슨 소리냐며 조금 전까지
분명 이곳 스님들이 길을 인도해서 왔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법당문을 열더니
관세음보살님 저 분이 우리를 인도하신 분이라는 겁니다.

그 이후로 김해 지방에서는 매년 양식을 중생사로 보내줬다고 합니다.
이처럼 『삼국유사』에 나오는 관음신앙의 영험담은
아이가 눈이 어두웠을 때 현실적으로 조화시키고
피난을 만났을 때 아이를 보호하는 등 현실을 구제하는
대비관음의 위신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유명한 설악산의 오세암 같은 경우도 오세 동자가
관세음보살님의 자비력으로 겨울삼동에 아무 탈없이 살았다 해서
오세암이지 않습니까? 현실을 조화시키는 위신력이 바로
관음신앙의 영험입니다. 그러나
관음신앙은 현실적인 조화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동해 낙산사 조신 스님의 이야기를 들어보시겠습니까?
조신 스님은 농장관리 소임을 맡고 있었는데 하루는
그 지방 원에 사는 따님을 보고 마음에 병이 들었습니다.
그 따님은 시집을 갔지만 스님의 사모하는 마음은 지워지지 않아
한탄도 하고 원망도 하곤 했지요.
하루는 낙산사 관세음보살님 앞에 가서 마음속에 담았던
답답한 기운을 풀고 기원도 하다가 잠깐 잠이 들었어요.
그런데 꿈속에서 그 사람하고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40년을 사는 거예요.
흉년이 들고 질병이 돌고 해서 집안이 흩어지고
이리저리 하다가 그 마지막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인간의 고통을 겪다가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깨어나고 보니 하루 저녁이었습니다. 그런 꿈을 꾸고 나니까
세상살이에 대한 미련과 집착이 일시에 없어져 버렸다는 거죠.
이러한 관세음보살의 영험은 도를 도와주는 위신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순전히 복만 받는 관음신앙이 아니라 조신 스님으로 하여금 부질없는
집착에서 벗어나 올바른 수도의 길을 가게 하는 관음신앙도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날에는 현실적인 조화만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삼국유사』에 보면 공부하는데 도움을 주는
관음신앙의 위신력과 현실적인 조화의 위신력이 고르게 나타나 있습니다.

도를 돕는 관세음보살의 위신력에 얽힌 또 다른 일화를 소개하면
경상남도 창녕에 가면 백월산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달달박박하고 노힐부득이라는 스님의 설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두 스님은 등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열심히 도를 닦았는데
어느 날 관세음보살님이 스님들의 공부를 돕기 위해
낭자로 화신해서 찾아갑니다.
달달박박 스님은 세상을 다 초월하고 속세를 등지고자 하는
생각이 아주 철저한 분이셨죠.

그래서 저녁에 길 잃고 방황하는 낭자를 도와주는 아량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낭자를 보고는 “여기는 나 혼자밖에 없고 세속의 여인이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니오”하며 관세음보살님을 쫓아냅니다.
할 수 없이 노힐부득 스님을 찾아간 관세음보살님.
그러나 노힐부득 스님은 달랐습니다.
“여기는 여인이 머물 수 있는 곳은 아니지만 첩첩산중에서
길 잃고 갈데 없는 처지이니 일단은 쉬어가도록 하시오”하며
여인을 맞아 주는 겁니다. 방에서 여인을 쉬게 하고
스님은 밖에 나가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이와 같이 불교에는
원이세속이라 하여 무조건 세속을 멀리 여의는 가풍이 있고
처렴상정이라 해서 세속을 가까이 하기는 하되
청정성을 지킨다는 가풍이 있습니다.
처렴상정은 물든 데 처해 있지만 연꽃처럼 항상 맑고
깨끗한 마음을 유지한다는 뜻입니다.
수도인들이 여성을 아예 멀리하는 경우도 있지만
여성을 상대하되 공식적으로 법답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경우가 처렴상정, 후자의 경우입니다.
원효 스님 같은 고승은 세속으로 들어가 버린 분입니다.

이처럼 불교에는 세 가지 양식이 있습니다.
아예 멀리 여의는 것,
상대에게 법답게 하는 것, 원효 스님이 요석 공주를 대하듯이
불교의 규율을 무시하고 파격적으로 대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첫 번째는 쉬운 방법이고
두 번째는 어렵고
세 번째는 상당히 어려운 것입니다.
원효 스님이나 되니까 요석 공주를 만나서 천추만대에
이름을 날리게 되지 보통 스님이라면
원효도 요석도 이름조차 없었을지 모릅니다.
잘 되면 역사를 초월하지만 잘 안 되면 즉시 끝나는,
마치 약으로 말하면 극약과 같은 이치입니다.
극약은 잘 먹으면 바로 쾌차하지만 잘못 먹으면 즉사하기 때문이죠.
노힐부득 스님의 경우 처렴상정으로 여인을 도와주기는 하되
다른 탈법적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여인이 갑자기 진통을 느끼며 산기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애를 낳아야 하니 물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노힐부득 스님은 물을 준비합니다.
여인은 아기를 낳고 준비해 준 물에 목욕을 합니다.
그러자 물이 금물로 변하는 것입니다.
여인은 스님에게도 목욕을 하라고 권합니다. 스님은 목욕을 합니다.
스님의 몸이 물에 닿자마자 황금빛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노힐부득 스님의 몸은 황금빛으로 변해 성불(成佛)합니다.
그리고 나서 여인은 “아시관음보살”, 즉 “나는 관세음보살이다” 하며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여기서 관세음보살은 세속적인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도를 이루게 하는 보살인 것입니다.

한편 경운 스님의 일화도
관세음보살의 위신력을 느끼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경운 스님이 마음에 병이 났는데 약을 먹어도 안 낫는 거예요.
그 소식을 듣고 한 비구니 스님이 오셨는데
경운 스님을 아주 유쾌하게 웃겼답니다.
그랬더니 병이 씻은 듯이 나았어요.
그래서 이분이 어디로 가시는가 했더니 남왕사라는 절로 가는 거예요.
그리고 짚고 가던 지팡이를 법당 앞에 꽂아 두는 거예요.
그래서 법당 앞에 가서 보니 법당 안에는
십일면관세음보살이 계셨다고 합니다.

경운 스님이 비구니 스님의 웃기는 표정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니
열한 가지 관세음보살님의 모습이더라는 거죠.
경운 스님의 울화병을 십일면관세음보살님이 고쳐 준 셈입니다.
이것이 바로 관음신앙입니다. 이처럼 관음신앙은 복을 받고,
병을 고치고, 벼슬을 하는 등 세속적인 조화를 위한 것이 대부분인데
『삼국유사』에는 수행하는 수도승들이 관세음보살의 도움을 받아서
도를 이룬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반야심경』 첫 머리는 관자재보살로 시작됩니다.
최상의 부처님이 아니면 관자재가 되지 않습니다.
관음신앙은 이렇게 여러 가지 면을 갖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관세음보살의 위신력을 생각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숙지해야 합니다.
모든 것은 인연으로 이루어지기에 관세음보살의 위신력을 만나는
인연을 잘 길러야 합니다.
이 인연법이 중요한데 의상 스님도 십전법을 갖고
불교를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화폐단위가 가장 낮은 게 1전이었죠.
요즘은 1원인데 지금 우리가 몇억, 몇조 이런 말들을 씁니다.
알고 보면 전부가 1원입니다. 1원이 빠지면 1억이 될 수 없습니다.
1원이 모여서 1억도 되고 몇 천억도 되는 거예요.

의상 스님은 벌써 1천년 전에 그런 이치를
『화엄경』에서 설명하고 있어요.
1원이 하나 있는데 그냥 1원이 아니고 인연을 따라서
여러 가지로 변화를 합니다.
1원이 1원 있는데 가면 2원이 되고, 2원 있는데 가면 3원이 돼요.
그때는 1원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1원이 99원 있는데 가면 100원이 됩니다. 이게 인연입니다.
999원 있는데 1원이 가면 순간 천원이 돼 버립니다.
이것이 무서운 거예요. 1억에서 1원 모자란 데 가면 1억이 돼구요.
1조에서 1원 모자란 데 가면 1조가 돼 버려요.
그렇다면 본래 1원은 변했을까요? 아니죠.
1원은 그대로 있으면서 2원도 되고 3원도 되고 1억 원도 되는 거예요.
이것이 불법(佛法)입니다.
혼자 뭘 하려고 하면 늘 1원으로 있는 것과 마찬가지죠.
그러나 부처님 법을 만나면 바로 만 원도 될 수 있고
몇억도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연법이라고 하는 것이 지중한 것입니다.

불국사 석굴암 부처님을 보세요. 분명히 부처님이죠. 형상불입니다.
그러나 단지 돌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부처님이 됐을까요?
불상을 조성하는 사람을 만나서 부처님이 된 거예요.
불국사에 가면 석가탑, 다보탑이 있지 않습니까? 이것도 돌이에요.
다보탑 만드는 사람을 만나서 다보탑이 되고 석가탑을 만드는
사람을 만나서 석가탑이 된 겁니다.

또 그 밑에 가면 계단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돌이거든요.
청운교는 다리를 만드는 사람을 만나서 다리가 된 것입니다.
돌은 다 같은 돌인데 부처님이 되고 탑이 되고 계단이 되고
다리가 된 겁니다. 그래서 인연을 만난다는 게 중요한 거예요.
우리가 관세음보살님을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인연을 만드는 것이죠. 바로 염피관음력입니다.
저 관세음보살의 위신력을 생각함으로 인해서
내가 달라지게 되는 겁니다.

이태백이 살았던 당시에 희한한 부자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왕륜(汪倫)이라는 부자가 가만히 생각하니까
자기는 천하에 부러울 것 없는데 다만 자신이 죽고 난 후에는
이름이 전해질 것 같지 않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름이 전해질 수 있을까,
생각을 하다가 당대 유명한 시인인 이태백이 자기를 위해 글
을 지어 주면 이름이 만대에 전해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태백이 부자인 자기를 위해 글을 지어 줄 것 같지 않았어요.
임금이 불러도 가고 싶지 않은 곳에는 가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부자는 거짓말을 했어요.
이태백이 제일 좋아하는 게 복숭아꽃과 술이니까 자기 마을에 가면
복숭아꽃이 많고 자기 집에 가면 좋은 술이 있다고 한 것이죠.
그러니까 이태백이 정말 왔답니다.
부자는 석달 동안 천하에 없는 술을 다 대접했답니다.
석 달이 지난 후에 이태백이 떠나면서 약속했던 글을 지어 줬는데
바로 이 시입니다.

“도화담수(桃花潭水) 심천척(深千尺)이
불급왕륜(不及汪倫) 송아정(送我情)이라”

“복숭아꽃, 연못물의 깊이가 천자나 된다고 하더라도
  왕륜이 나를 보내 주는 정에는 미칠 수가 없다.”

이태백이 부자에게 지어 준 시는 문집에 올라 있습니다.
그 결과 천 삼백년 가까이 왕륜이라고 하는 이름이 전해지는지 모릅니다.
만약 이태백이 시를 지어 주지 않았다면 왕륜이라는 부자가 있었는지
우리가 어찌 알았겠습니까? 그래서 후대 사람들의 말이
“파리가 저 혼자 날면 하루 종일 십리도 못 나는데 천리마
궁둥이에 붙으면 천리간다”고 했어요.
그런데 요즘에는 천리마가 문제가 아닙니다.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면 바로 미국까지 날아가 버리죠.
나 혼자 날면 어찌 한국에서 미국에 갈 수나 있겠습니까?
서울 가는 기차타면 서울 오고 부산 가는 기차타면 바로 부산까지 갑니다.
이것이 바로 인연입니다.

따라서 관세음보살을 생각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외부의 장애라든지 내부의 장애라든지 혹은 도를 닦는 사람도
관세음보살의 위신력으로 성취하는 과정을 우리 조상들은
신앙을 통해서 줄곧 발견해 왔던 것입니다.
염피관음력, 관세음보살님을 늘 생각하고 예배하고 공양하는
관음신앙을 생활 속에서 늘 실천해 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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