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덕스님─사랑은 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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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보광사 댓글 0건 조회 914회 작성일 14-06-04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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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주는 것***

      • 불교에서 자비의 뜻은 고를 없애고 즐거움을 주는 (拔苦與樂) 것이다. 상대방의 괴로움을 자기 괴로움으로 알고 그 괴로움을 없애주며 그에게 기쁨을 준다는 것은 끝없는 사랑이 없이 어찌 가능할까. 자타(自我) 대립이 없이 온 중생을 자기로 삼는 커다란 참자기에 눈떴을 때 일체중생에게 조건없는 동체의식 (同體意識)이 흘러나오는 것이니 이것이 대자대비(大 慈大悲)이고 보살의 마음이다. 부처님께서는 조건없는 무한의 사랑을 가르치신다. 무연대비(無緣大悲), 무차대비(無遮大悲)다. 이런 믿음에서 [여러가지 중생들을 수순하여 받아 섬기며 가지가지로 공양하기를 부모와 같이 공경하며 스승이나 아라한이나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없이 받드는] (普賢行願品) 보살의 행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사람은 필경 이런 큰 자기에 눈뜨고 큰 사랑을 주는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이 땅에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큰 사랑은 단번에 이루기 어렵기 때문에 몇번이고 반복하여 이 지상에 태어나면서 연습을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자비가 인간 자신을 향상시켜 주는 것이며 스스로 행복하고 그를 만나는 상대방을 행복하게 하며 그들이 사는 땅 위에 행복을 심게 하는 것이니 과연 대자대비는 온 생명이 영겁을 두고 추구할 영원한 가치다. 그런데 이러한 자비심에 집착심이 작용할 때 거기에는 자비행에서 벗어난 편협한 사랑이 되고 대자대비의 참사랑이 때묻게 된다. 이런 때묻은 사랑이 작용하는 데서 자기도 괴롭고 남에게도 괴로움을 끼치게 되는 것이다. 집착심은 상대방을 이기적인 생각으로 결박시킨다. 설사 귀여운 아기의 향상을 위한 노력이라도 그것이 집착적인 사랑일 때 아기는 속박감을 느끼고 그 속박 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아내에 있어 남편에 대한 사랑도 역시 그렇다. 자기 뜻대로 생각하는 집착적인 사랑이 남편에게 구속감을 느끼게 하고 혹은 반항하든지 귀찮아 하든지 때로는 한눈을 팔든지 하찮은 도락에 빠지게도 된다. 강아지나 고양이라도 사람이 귀여워 해주는듯 하지만 실지로는 큰 부담을 주고 있는 것을 보는 것과 같이... 사랑은 마땅히 상대방을 구속시키는 집착에서 벗어난 것이어야 한다. 무관심이 되라는 말은 아니다. 오직 주는 사랑, 그의 편이 되는 사랑이 되어야 참자비 하심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에서 기쁨이 나고 친절심이 나고 밝은 마음이 퍼져나간다. 상대방에게 바쳐진 자비심이 서로의 참인격을 성장 시키는 것이다. 대개 집착적인 사랑 다음에 오는 것은 미움과 실망과 냉담의 교차다. 자기도 불안하고 남도 불안하고 그들 사이와 환경이 불안한 것이다. 우리는 항상 주는 사랑을 배워야 하겠다. 순수하게 주는 사랑을 향해서 끊임없는 노력을 하자. 한 두번에 안된다고 비관할 것도 없다. 우리의 참면목이 모두와 함께 하는 동체인 것을 믿고 꾸준한 노력을 기울이자. 부처님께서는 이런 수행에서 성불하셨고 불국정토도 실현하였던 것이다. 광덕스님[빛의 목소리] 중에서
flo38.gif 부처의 길/노무라 소지로(오카리나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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